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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marães, H.(2019)의 「Suspending Disbelief(pp. 214-219)」

칼럼
작성자
 TotalEsNueve
작성일
2022-07-27 03:06
조회
1760
0.

포루투갈의 마술사 Helder Guimarães의 책 『Secret Language Vol. 1』에 수록된 에세이 중 하나인 「Suspending Disbelief」에 대한 제 나름의 독후감 정도로  썼던 글입니다. 몇 년 전에 써서 친구들이랑만 돌려 읽었던 글인데, 가입한 기념으로 조금 수정해서 포럼에 올려 봅니다.

1.

「Suspending Disbelief」. 굳이 한국어로 번역을 하자면 ‘불신 지연시키기(?)’ 정도가 될 것이다. 누구의 불신인가? 마술사에 대한 관객의 불신이다. 아주 단순한 구조만을 생각해 보자. 트릭이 없이는 마술도 없다. 그러나 관객이 마술사를 조금 불신한다고 해서 마술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헬더는 그래도 불신을 막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완벽한 체험을 남기기 위해서이다. 관객이 마술사를 믿지 않는 순간 관객은 마술사에게 도전(challenge)하고 싶어진다. 도전이 시작되는 순간 관객의 관심은 마술사의 공연이라는 전체가 아닌 마술사의 트릭이라는 부분에 집중하게 된다. 당연히 관객은 저 마술사가 어떻게 사기를 치는지 알아내야겠다는 생각만 든다. 그 순간 완벽한 체험은 없어지고 승부에 대한 피로감만 남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불신을 막을 것인가. 우선 마술사가 관점을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 ‘트릭=마술’이라는 생각을 버리는 것이 먼저다. 트릭은 마술의 일부분일 뿐이다. 마술사가 먼저 트릭에 너무 집착하지 않아야 관객 역시 트릭에 집착하지 않게 된다. 그렇다고 헬더가 트릭 개발을 포기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헬더는 트릭에 신경 쓰는 만큼 ‘이 트릭으로 관객이 어떤 체험을 하게 될지’를 신경 써서 공연에 깊이를 더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 공연은 ‘관객이 관람하고 난 후에 이야기를 할 만한’ 공연이 된다.

2.

불신을 막기 위해서 헬더가 가장 집중한 것은 바로 'magical atmosphere'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magical atmosphere'는 무엇인가? 헬더가 본인의 에세이에 스페인의 위대한 마술사 Arturo de Ascanio의 말을 옮겨둔 것이 있다. 여기에도 그대로 옮긴다.

“...the magical atmosphere occurs when, in a sequence of effects, everything happens as if the authentic magic really existed."

‘마술이 진짜로 있다고 믿게 되는 순간’이 바로 'magical atmosphere'가 만들어지는 순간이다. 아주 단순한 명제이지만, 사실 이러한 순간을 만들어 내기란 쉽지 않다. 헬더가 'magical atmosphere'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선택한 전략은 바로 ‘스토리텔링’이다. 마술에 서사를 만들어 붙이는 것이다. 왜 스토리인가? 스토리는, 그것이 진짜이든 허구이든, 마술사의 사고를 따라올 수 있게끔 관객에게 길을 제공한다. 관객은 마술사의 스토리를 따라가면서 자연스럽게 마술사의 생각과 논리를 따라가게 된다. 그렇게 되면 관객은 마술사와 한 배를 탄 것이 된다. 정리하자면 스토리에는 두 가지 장점이 있는 것이다: 첫째, 모든 스토리에는 크든 작든 공감할 만한 지점이 있다. 둘째, 모든 스토리에는 그만의 논리가 있다. 같은 스토리를 통해서 마술사와 관객이 같은 체험을 하게 되는데 어떻게 관객의 마음속에 도전 의식이 싹트겠는가?

스토리텔링은 헬더의 마술 전체를 관통하는 아주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이다. 『Secret Language Vol. 1』에 실린 거의 모든 루틴들에는 아주 상세하게 패터가 제시되어 있다. 패터의 어느 부분에 어느 기술이 들어가면 좋다는 식의 설명까지도 제시되어 있다. 헬더가 이렇게 자세하게 루틴을 설명해 놓은 이유는 루틴 하나하나에 들어 있는 스토리를 온전히 전달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루틴마다 스토리가 딸려 있다 보니 당연히 기술이 사용되는 맥락이 중요해지기 마련일 것이다. 헬더의 이러한 루틴 구축 방식은 필자의 방식과는 거의 정반대 지점에 있다. 필자는 즉흥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을 좋아하고, 마술에서 스토리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필자는 오로지 재미라는 관점에서 관객과 대놓고 퍼즐 놀이를 즐기겠다는 느낌으로 마술에 접근하는 경우가 많은 반면, 헬더는 관객에게 완성된 체험을 전달한다는 관점에서 마술에 접근한다. 두 방식 모두 장단점이 있을 것이다. 굳이 변명을 보태자면, 철저하게 아마추어로서 마술을 즐기는 필자는 완성된 공연을 만들어서 올릴 일이 없다. 필자의 마술은 술자리에서나 가끔 하는 단편적인 마술이고 따라서 스토리에 대한 고민을 굳이 할 필요가 없다(사람들은 술 먹으면서 긴 이야기를 듣기 싫어한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만 마술을 하게 되면 헬더의 말처럼 관객의 머릿속에 남는 것이 없게 된다. 그냥 재밌고 마는 어떤 것으로만 치부되어 관객에게 여운이 남는 감동을 주기는 어렵다.

3.

그렇다고 해서, 헬더는 모든 마술사가 스토리 작가가 되어야 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헬더의 예시에 따르면, 멘탈리스트들이 바디 랭귀지나 NLP 따위의 그럴 듯한 가짜 해결책(pseudo solution)을 끌고 들어오는 것도 스토리텔링의 일종이다. 그리고 마술을 마술에서만 끝내지 않고 세상의 다른 현상이나 사건과 결부시키는 것도 스토리텔링의 일종이라고 한다. 헬더의 예를 그대로 들고 오자면 이런 것이다: 마술사가 오픈 프레딕션 마술을 한다고 하자. 마술사는 이렇게 이야기 하면서 마술을 시작한다. ‘우리가 미래를 알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을 피할 수 있을까요?’ 이런 패터로 마술을 시작하게 되면 사람들은 이 마술을 단순히 마술에서만 끝내지 않고 자신이 생각하는 운명론과 마술을 결부시켜 생각하게 된다. 이때부터 관객이 보게 되는 것은 단순한 마술이 아니라 어떤 체험이 되는 것이다. 이 자체로 마술사는 관객에게 스토리를 전달할 수 있게 된다.

관객을 스토리로 초대함으로써 ‘magical atmosphere’를 구축하자는 헬더의 말은, 어쩌면 ‘적어도 관객을 적으로 둘 필요는 없다’는 오랜 마술 격언에 대한 그만의 해석 방식이 아닐까 싶다. 예를 들어 보자. 마술을 하기 전에 ‘카드 마술 하나 할게요’보다는 ‘카드를 가지고 확률에 관한 실험을 하나 해 볼까요’라고 하는 것이 조금 더 ‘체험’에 가까운 진행 방식이 아닐까. 퍼즐은 풀어헤치고 싶어지지만 체험은 함께 참여하고 싶어지는 법이니까.

4.

이런 에세이를 읽었다고 해서 필자가 바로 ‘설계맨’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헬더의 방식을 차용하면 마술이 끝난 뒤에 ‘이거 어떻게 하는 거예요’ 따위의 질문은 조금 덜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필자야말로 아마추어 마술사라는 핑계를 대면서, 관객에게 도전하는, 이상하게 자기중심적(?)인 마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어떻게든 우격다짐으로 포싱을 성공시키고 싶은 나의 마음은 멈출 수가 없다.

 

 

 

트릭에 대한 불신이 아닌 ‘사람에 대한 불신’을 말한다. 모든 마술은 죄가 없고, 항상 사람이 문제다.

‘트릭’이라는 용어보다는 ‘작동 원리’라고 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겠다. 마술이라는 것의 요지는, 그 밑에 깔린 비밀이 있든 없든 관객이 마술의 작동 원리를 정확히는 모르게끔 하는 것일 테니까 말이다.

편의상 ‘헬더’라고 지칭하였다. 포루투갈어 원어대로 발음하자면 ‘엘데르’에 가깝게 들리긴 하겠으나...

한국어로 번역하면 ‘마술적 분위기(?)’ 정도로 쓸 수 있겠다. 그러나 어색함이 느껴져서 'magical atmosphere'라는 원어를 계속 사용했다.

아예 판타지적인 스토리를 가져갈 것인지, 조금은 현실적인 스토리를 가져갈 것인지는 마술사의 선택에 달렸다. 다만 하나를 선택했다면 그 이후부터는 마술사가 만들어 낸 세계관을 일관성 있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과한 설정을 가져갔으면 끝까지 그 과한 설정을 유지해야 한다. 과하게 시작해서 과하게 끝내는 전략으로 성공한 액트 중 하나가 플로리안 상베(
Florian Sainvet)의 로봇 액트일 것이다. 한편으로 요즘은 그러한 과한 설정이 관객에게 쉽게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니 조심할 필요는 있겠다. 실제로 헬더도 판타지보다는 현실성에 집중하는 듯하다. 헬더는 루틴을 시작하기에 앞서 인트로로 하는 이야기들을 대부분 실화에 바탕을 둔 이야기로 선택한다고 한다. 그 방식이 조금 더 믿음직한(?) 접근법이기 때문이다.
전체 10

  • 2022-09-10 17:58

    좋은글이네요


  • 2023-01-05 23:14

    좋은 글 감사합니다


  • 2022-10-03 14:43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2022-07-27 15:18

    좋은 글 감사합니다~ 😀


  • 2022-07-27 15:24

    적절한 스토리가 들어간 액트에 관해서 고민중이였는데 좋은 글 감사합니다!


  • 2022-07-27 15:39

    칼럼으로 카테고리 변경되었습니다


  • 2022-07-27 15:43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적확한 설명이네요. 모든 마술인들이 한번씩 읽어보면 좋겠네요


  • 2022-07-29 21:16

    깊은 식견이 느껴지는 글 잘 읽었습니다. 다음 글도 기대할게요~!


  • 2024-02-11 21:20

    좋타


  • 2023-09-10 09:07

    너무 좋은 글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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